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빈센트 반 고흐 (문단 편집) === 어린 시절 === [[19세기|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남부 노르트브라반트주 쥔더르트(Zundert)에서 [[https://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Van_Goghkerkje|네덜란드 개혁교회]](Nederlandse Hervormde Kerk)[* 링크된 교회가 바로 테오도뤼스가 목회생활을 하던 교회로 현재는 관광지화되었다.] 목사 테오도뤼스 반 고흐(Theodorus van Gogh, 1822–1885)와 아나 코르넬리아 반 고흐카르벤튀스(Anna Cornelia van Gogh-Carbentus, 1819–1907) 부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흥미롭게도 고흐에게는 태어나기 전에 죽은 형(1852년생)이 있었는데 그 형의 이름도 빈센트 빌럼이었다. 그의 형이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흐는 살면서 죽은 형을 대신해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항상 했다고 한다. 그게 고흐의 불행을 자초했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고흐는 죽은 사람을 대신하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항상 죽음을 생각하고 살았다고 한다. * 빈센트 빌럼(Vincent Willem, 1852–1852): 태어난 날 바로 죽었다. * '''빈센트 빌럼 반 고흐'''(1853–1890): 빈센트 빌럼은 형의 이름에서 따왔다. * 아나 코르넬리아(Anna Cornelia, 1855–1930) * 테오도뤼스 테오(Theodorus (Theo), 1857–1891) * 엘리사벳 휘베르타 리스(Elisabeth Huberta (Lies), 1859–1936) * 빌레미나 야코바 빌(Willemina Jacoba (Wil), 1862–1941) * 코르넬리스 빈센트 코르(Cornelis Vincent (Cor), 1867–1900) 아버지 테오도뤼스 반 고흐는 멋쟁이이고 미남자이긴 했지만 개신교 목사의 능력으로는 범상한 수준이었다. 고흐가 태어난 쥔더르트는 벨기에 국경 근처의 별볼일 없던 마을인 데다가 여타 노르트브라반트주[* 옆의 림뷔르흐주와 함께 골수 가톨릭 주로 통하는 곳이다.]의 마을들이 그렇듯 가톨릭의 세가 더 강한 곳이었고, 그나마도 테오도뤼스가 이 지역에 부임하게 된 건 역시 개신교 목사였던 고흐의 할아버지[* 할아버지도 똑같이 이름이 빈센트(Vincent Ferdinand Jacob van Gogh, 1789–1874)다. 빈센트의 동생 테오(1857–1891)의 아들도 똑같이 이름이 빈센트(Vincent Willem van Gogh, 1890–1978)이다.]가 여기저기 찔러서 겨우 얻어낸 자리였다. 어릴 때의 고흐는 그냥 평범한 아이였다. 고흐가 태어난 지 2년 후에 여동생 아나 코르넬리아가 태어났고 그로부터 다시 2년 후에 고흐의 평생 친구이자 동반자가 된 남동생 테오가 바로 이때 태어났다. 흔히 고흐가 어릴 때부터 미술에 두각을 드러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고흐는 미술가보다는 [[장 앙리 파브르]] 같은 곤충학자가 될 자질이 보이기도 했다. 여동생 중 한 명인 엘리사벳의 회고로는 고흐는 모든 곤충의 이름을 잘 알고 있었고 곤충들을 과학자처럼 자세히 관찰했을 뿐만 아니라 과학자처럼 꼼꼼하게 수집하고 분류했다고 한다. 이런 면모는 나중에 고흐의 그림에서 자연이 큰 비중을 차지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고흐는 상당한 독서광이었다. 신학서적과 문학작품을 많이 탐독했는데 이 또한 고흐의 나중 인생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고흐의 미술적 재능은 직접적으로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 어머니 아나 코르넬리아는 직접 야생화를 스케치하거나 직접 만든 꽃다발을 수채화로 그리는 등 미술을 취미생활로 즐겼으며 어린 고흐가 9살 때 개를 보고 그린 스케치는 어머니의 영향이 직접적으로 보이는 희귀한 자료다.[* 이때 작품들만 봐도 웬만한 미대생들보다 좋은 기본기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흐가 11살이 되자 부모는 그를 쥔더르트에서 25km 떨어진 제벤베르헌(Zevenbergen)의 개신교 교사가 운영하는 기숙학교로 보냈다. 이곳에서 고흐는 프랑스어와 영어를 기초부터 갈고 닦아서 나중에는 모국어인 네덜란드어 만큼이나 유창하게 말할 정도가 되었고 독일어도 상당히 능통한 수준이 되었다.[* 네덜란드는 특성상 인근국가들과 교역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인근국가들의 언어인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함께 배우는 게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네덜란드에선 영어와 프랑스어 정도는 할 줄 아는 국민들이 대부분이다.] 13살이 된 1866년에 제벤베르헌에서 기초교육을 마친 후 쥔더르트에서 더 멀리 떨어진 틸뷔르흐(Tilburg)의 빌럼 2세 국립중학교로 진학했다. 이 학교는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미술이 교과 커리큘럼에 하나로 도입되어 있었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파리에서 명성을 쌓아가고 있다가 눈이 먼 아버지를 돌보려고 고향으로 돌아온 화가 콘스탄트 코르넬리스 하위스만스(Constant Cornelis Huijsmans, 1810–1886)가 이 학교의 미술교사였는데 고흐는 하위스만스 밑에서 미술 수업을 받았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기 때문에 즐거운 수업이긴 했지만 원근법 만큼은 익히지를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868년 3월, 고흐는 갑자기 학교를 자퇴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왜 자퇴했는지는 수수께끼지만 학자들은 이때 고흐가 정신장애나 발작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추측을 한다. 고흐의 집안에는 정신병력이 있었는데 이게 고흐에게도 유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발작이 지나가자 집에서의 생활이 따분해지던 차였고, 아버지도 아들녀석이 다 컸는데 학교에 보내자니 돈은 많이 드니 일이라도 시켜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것들이 맞아떨어져서 16세 때 큰아버지 센트의 주선으로 헤이그의 미술상인 구필 화랑(Goupil & Cie)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